환경 친화적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이를 적시적소에 공급하는 에너지 저장 기술이 세계적 화두다. 전력망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해결책이자 전력 시스템의 효율과 유연성을 높이고 재생에너지의 활용과 확산을 지원하는 다양한 전기에너지 저장 기술을 살펴보자.
전기를 저장하는 7가지 방법
물리학에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이르는 에너지는 운동, 위치, 빛, 열, 화학, 전기 등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특히 전기에너지는 오늘날 인류가 가장 흔히 사용하는 형태다. 친환경 이슈에 따라 환경에 부담을 덜 주는 방법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재생에너지 트렌드가 확고해진 이래 전기에너지는 반드시 ‘저장’이라는 방법론을 동반한다. 전기에너지의 생산과 수요의 불균형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중에 사용할 에너지를 미리 저장하는 기술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이용해 환경 친화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방법의 일부는 간헐적으로 작동한다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어 태양전지는 햇빛이 없는 밤에는 발전이 불가능하며 낮이라도 구름이 낀 날에는 전력 생산 효율이 떨어진다. 풍력 발전 또한 바람이 잦아들면 터빈이 느려지거나 멈출 수 있다. 수력이나 지열 등 날씨에 민감하지 않은 재생에너지도 있지만, 이들 또한 갑자기 증가하는 전력 수요에 대처하기는 힘들다.
이에 따라 전기에너지를 다양한 형태로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에너지 저장 시스템Energy Storage System(ESS)이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 ESS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지만 최근 전력망에 연결하는 대규모 에너지 저장 기술로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친환경 에너지 트렌드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ESS 중에서도 10시간 이상 전력 공급이 가능한 장주기 에너지 저장Long-duration Energy Storage(LDES) 시스템은 오늘날 전력망의 신뢰성과 회복력을 높이는 솔루션이자 효율과 유연성을 높이고 재생에너지의 활용과 확산을 지원하는 필수적인 기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해 전력을 공급하는 배터리는 1800년대부터 사용해온 에너지 저장 기술의 고전이다. 다만 개별 배터리 또는 무정전 전원 공급장치UPS를 아주 크게 확대해 대규모 전력망에 연결한 형태라고 이해하면 된다. ESS를 곧 거대한 배터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배터리 에너지 저장 시스템BESS은 다양한 ESS 중의 한 종류다. 전력망의 수요가 급증할 때 즉각 대응할 수 있는 배터리는 단위 질량 및 부피 대비 에너지 저장 효율이 높고 직 · 병렬 연결로 전압이나 용량을 쉽게 늘릴 수 있어 유연성과 확장성이 우수하다. BESS는 통상 몇 시간 분량의 최대 정격 전력을 출력해 피크 전력 공급 및 전력 보조에 효용성이 좋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수백 개 이상의 BESS가 운영되고 있다. 그중 저장 용량 1000MWh 이상의 초대형 BESS는 10개가 넘으며, 또 그보다 많은 수의 초대형 BESS가 신규 건설되고 있다. 최근의 BESS는 리튬 기반의 배터리를 주로 사용하는데, 에너지 밀도가 조금 낮지만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안정성이 높은 나트륨 기반 배터리의 공급 확대와 맞물려 점차 전환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에는 미국 텍사스에서 전기차에 쓰였던 폐배터리를 수집 · 선별해 재사용한 53MWh급 BESS가 해당 지역 전력망에 합류했다.
전 세계 수력발전소 10개 중 1개가 양수발전소일 정도로 널리 구축된 전통적인 ESS 기술이다. 양수발전Pumped-Storage Hydroelectricity은 높낮이가 다른 두 저수지를 조성하는 게 포인트다. 전력망의 수요가 적은 시간의 잉여 전력으로 하부지에서 상부지로 물을 끌어올려 저장했다가 전력 수요가 많을 때 낙하시켜 발전하는 원리다. 물의 위치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수력발전과 동일한 방식이지만 물을 ‘내려보내고 길어올리는’ 사이클을 반복한다는 점이 다르다.
양수발전은 낙수 밸브만 열면 최단 5분 이내에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가동성과 효율성이 우수해 정전이나 전력 소비가 폭증할 때 유용하다. 현재 전 세계 전력망 에너지 저장 용량의 95%를 양수발전소가 담당하고 있다. 주로 산악지대에 국한하는 입지의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 해양 공간을 이용한 양수발전도 주목받고 있다. 해안가 고지대에 상부 저수지를 만들고 지하에 배관과 터빈을 설치해 해수로 발전하는 해안-내륙 방식, 깊지 않은 해양에 대규모 인공 저수지를 만들어 낙차를 확보하는 방식, 수심 수백m 이상의 해저면에 발전 설비를 구축하는 수중 저장 방식 등이다.
발전소 증기 터빈의 클로즈업. 압축공기 또한 터빈을 구동해 전력을 생산한다.
©GettyImagesKorea에너지 저장 매체로 공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두 가지 있다. 먼저 압축공기 에너지 저장Compressed Air Energy Storage(CAES)은 전력망의 저부하 시간 또는 잉여 전력으로 공기를 압축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방출하며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최초의 CAES는 1978년 독일에서 지하 암염층에 굴착한 소금 동굴에 최대 71기압으로 압축한 공기를 저장하는 훈토르프 발전소였다. 올해 1월에는 중국 잉청에서 두 개의 소금 동굴에 약 70만㎥의 압축공기로 1500MWh의 전기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CAES가 상업 운영을 개시했다.
이처럼 압축공기의 저장에는 암염층이 적합한데, 이런 제약을 타개하는 방안도 있다. 고압 탱크를 지하에 매설하거나 광산의 폐갱 또는 폐터널을 개조하는 등의 묘수다. 지상 면적을 차지하지 않는 수중에도 설치할 수 있다. 수압을 이용하면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굴착이나 고압 탱크 없이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유연한 주머니에 고압 공기를 저장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공기를 이용하는 두 번째 에너지 저장 기술은 극저온, 즉 공기를 -195°C로 냉각해 액체 상태로 만들어두는 것이다. 진공 단열 용기에 보관한 액화공기를 기화시키면 부피가 700배로 늘어난 공기가 터빈을 돌려 전력을 생산한다. 이러한 액화공기 에너지 저장Liquid Air Energy Storage(LAES) 시스템은 배터리 방식보다 대용량 고밀도 저장이 가능하며, 충전-방전 사이클이 길고 지역 제약이 없는 데다 친환경적이고 안전해 도시에 적용하기도 적합한 방식이다.
전력망에 연결된 대규모 ESS로서 LAES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영국 정부의 지원으로 2018년 15MWh의 저장 용량을 갖춘 시범 발전소를 운영한 바 있는 ESS 기업 하이뷰 파워는 현재 맨체스터 인근에 상업용 LAES를 건설 중이다. 전기에너지 저장 용량은 300MWh급. 중국 거얼무Golmud에서는 태양광 발전소 및 집광형 태양열 발전소CSP와 함께 구성되는 세계 최대 규모(저장 용량 600MWh)의 LAES 시설을 짓고 있다. 미국과 칠레도 각각 400~500MWh 용량의 LAES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수소는 다양한 방법으로 생산되고 있다. 현재 널리 사용되는 것은 제철 · 석유화학 · 정유 등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가스를 정제해 얻는 ‘부생 수소’ 또는 석탄 · 석유 ·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만든 ‘개질 수소’다. 이에 비해 풍력과 태양광 등 지속 가능한 재생에너지로 물을 전기분해해 생산한 환경 친화적 수소를 특별히 ‘그린 수소Green Hydrogen’라고 구분한다. 수소는 이미 많이 생산하고 또 사용하고 있지만, 이처럼 재생에너지로 만든 수소를 저장하는 방식을 그린 수소 에너지 저장Green Hydrogen Energy Storage이라고 부른다.
수소 저장 기술에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이 액화수소다. 액화천연가스LNG의 -162℃보다 훨씬 더 낮은 -253℃ 이하로 유지하는 극저온 탱크에 저장한다. 좀 더 용이한 수소 저장 기술도 속속 연구돼 실증 및 상용화에 나서고 있다. 화학반응을 통해 수소의 흡수 · 방출이 가능한 유기화합물인 액상 유기물 수소 운반체LOHC가 그중 하나다. 간단히 말해 수소를 다른 물질과 결합시켜 보관했다가 사용할 때 분리해 수소를 추출하는 방법이다. 기체 상태의 수소 대비 600~700분의 1로 부피가 줄고 상온 · 상압 저장이 가능해 안전성이 높고 운송에도 유리하다. 질소와 수소의 화합물인 암모니아를 이용하는 방법도 개발되고 있다. 암모니아는 액화시켜 저장하기도 상대적으로 쉽고(-33℃), 물에 잘 녹아 상온 · 상압 저장도 가능하다.
수소를 다시 전기에너지로 환원하는 데는 수소 터빈과 수소 연료전지가 사용된다. 천연가스 터빈으로 발전기를 돌리는 기존 화력발전소가 탄소 배출 감소를 위해 수소를 섞어 태우는 방식으로 개조되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곧 100% 수소 터빈 발전소도 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연소 과정이 없고 물만 배출하는 고효율 에너지 변환 장치를 사용하는 연료전지 발전소는 대규모 전력망의 예비 발전소로도 설치되곤 하며, 한국에서는 전기는 물론 지역난방용 온수까지 공급하는 세계 최대 규모인 설비용량 80MW급 연료전지 복합 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현재 전체 수소 생산량에서 그린 수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지만 재생에너지 점유율이 높아질수록 전력망급 에너지 저장 기술로 그린 수소가 각광받을 가능성이 크다.
기준면에 대해 ‘높이’를 지닌 모든 물체가 갖고 있는 위치에너지를 이용하는 중력 에너지 저장 시스템Gravity Energy Storage System도 적극적으로 실증 및 적용하고 있는 기술 체계다. 앞서 살펴본 양수발전(수력발전)이 높은 데서 쏟아지는 물의 ‘흐름’으로 전기를 일으킨다면 중력 발전은 무거운 물체가 높은 ‘위치’에서 추락하는 힘을 활용한다는 데서 차별적이다. 전력 수요가 적은 시간이나 잉여 전력으로 콘크리트 블록 등의 중량물을 높이 들어올려 두었다가(저장) 천천히 떨어뜨리면서 일종의 회생 브레이크 장치로 전기를 생산(회수)한다. GESS는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날씨에 의존적이지 않으며 수명이 길다는 점이 매력으로 꼽힌다.
스위스의 스타트업 에너지볼트는 중국 루둥에 세계 최초의 상업적 GESS를 구축했다. 가로 · 세로 · 높이 120×110×148m의 빌딩형 시설에 저장 가능한 에너지 용량은 100MWh이며 에너지 회수(발전) 지속 시간은 최대 4시간이다. 이처럼 지상에 전용 시설을 짓는 방식도 가능하며, 영국의 그래비트리시티나 미국의 그래비티파워 등의 회사는 쓸모를 다한 폐광 인프라를 중력 에너지 저장 시설로 재활용하거나 수직 갱도를 굴착해 건설하는 지하 중력 에너지 저장Underground Gravity Energy Storage 시스템도 개발 중이다.
관성은 아이작 뉴턴이 물체의 운동을 다루는 세 개의 물리 법칙 중 제1법칙으로 정의했을 만큼 고전 물리학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다. 운동하는 물체가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관성의 법칙이다. 전기차의 회생 브레이크가 바로 관성 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회수하는 장치다. 이 개념을 고정된 시설에 구현하는 기술이 관성 에너지 저장Inertia Energy Storage 장치다. 공기 마찰조차 배제하기 위한 진공 체임버 속에서 육중한 플라이휠을 고속으로 회전시켜 두었다가 순간적인 전력 부하 급증에 대응해 즉각적으로 전력을 생산한다.
최대 90%의 에너지 효율을 달성할 수 있는 이 기술은 밀리초 단위의 충전-방전 전환이 가능해 기동성이 좋으며 수명이 길다는 장점을 지녔다. 장주기 에너지 저장LDES 기술이 아니라서 전기에너지를 공급하는 시간은 짧지만 전력망 안정, 무정전 전원 공급에 효용이 크다. 2022년 지멘스가 아일랜드의 머니포인트 발전소에 설치한 원통형 동기식 축전기Synchronous Condenser는 3000rpm으로 회전하는 66톤짜리 로터 및 130톤짜리 플라이휠의 회전 질량을 통해 전력망 안정화에 필요한 관성을 제공한다.